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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토마스 파에드 - 펜 대신 붓을 사용한 시인 화가

 

펜 대신 붓을 사용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화가가 있습니다.

그림에 담겨 있는 따뜻한 감성이 사람들에게는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화가 토마스 파에드 (Thomas Faed /1826 ~1900)의 작품 속 장면들에서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 삶의 고단한 면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일족    The Last of the Clan / 86.3cm x 111.2cm / oil on canvas / 1865

 

배를 묶어 놓은 밧줄을 풀기 위해 붉은 셔츠를 입은 사내가 허리를 굽혔습니다. 순간 부두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참담해졌습니다.

말을 타고 고개를 떨군 노인이 아마 환송 나온 사람들 중에 가장 어른인 것 같습니다. 급기야 손에 얼굴을 파 묻고 우는 여인도 보입니다.

18세기와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에는 하일랜드 클리어런시스 ((Highland clearances)라는 최악의 강제 이주 정책이 펼쳐졌습니다.

이로 인해 오랜 전통을 유지하던 전통적인 씨족이 해체되었고 이주를 하게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카나다행 이민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민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젊은 남자 뿐이었습니다. 아이와 노인 그리고 여인들은 스코틀랜드에 남아야 했습니다.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약을 할 수 없는 이별은 늘 참담합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의 탄식과 울음 소리가 부둣가를 훑고 지나가는 파도 소리에 섞여 사람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파에드는 스코틀랜드의 커쿠브리에서 기계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명의 형제 자매 중 형인 제임스는 동판화가로,

동생 존은 세밀화가로 이름을 남겼으니까 이들의 핏속에는 예술가 DNA가 풍부했던 모양입니다.

파에드가 처음 그린 그림은 실내 풍경을 그린 유화였는데 그의 나이 열 두 살 때였습니다.

그 나이 때 저는 열심히 만화를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집이 있는 사람과 집이 없는 사람   Home and Homeless / 66.7cm x 95.6 cm /oil on canvas / 1856

 

참 안타까운 풍경입니다.

갈 곳 없는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잠시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집 주인 식구와 이렇게 구별되는군요.

빛이 환하게 비치는 식탁에 여주인이 큰 음식 그릇을 내려 놓고 있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힌 집주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아이들 모습이 보입니다. 세어보니 네 명입니다. 그런데 식탁에는 오직 한 사람 분의 스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식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이나 구석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는 여인의 표정이나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창 너머로 해는 지고 있는데 오늘 저녁이 또 걱정이군요. 물론 집주인의 생활도 넉넉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 여섯이 되던 해, 파에드는 의류상의 점원이 되기 위해 견습생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했던 그는

세밀화 공부를 하는 동생을 돕는다는 이유를 들어 다음 해 에딘버러로 갑니다.

아직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결심을 못하고 있는 저와 비교해 보면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에딘버러에 도착한 파에디는 에딘버러 미술학교에 입학, 그림공부를 시작합니다.

 

 

 

잘못이야   Faults on Both Sides / 67.3 cm x 55.2 cm / oil on canvas / 1861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비록 나란히 앉았지만 시선은 혹시라도 섞일까 봐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에 대해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입니다. 남자는 지팡이를 입에 대고 터져 나오는 화를 애써 참고 있습니다.

부릅뜬 눈에서는 아직 풀리지 않은 노여움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인의 분노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손에 감은 천을 불끈 쥔 모습과 꼭 다문 입술, 눈물이 옅게 어린 눈을 보고 있으면 여인도 몸 전체로 끓어 오르는 열기를 참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화해를 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화도 나지 않거든요.

화가 났다는 것은 아직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조금 지나면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입씨름을 하겠지만 아마 그 것으로 끝일 겁니다.

저도 많이 해 본 일이거든요.

 

파에드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금메달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보여 주었지만 화가로서 성공은 조금 더 뒤의 일이었습니다.

열 여덟이 되던 해 처음으로 로열 아카데미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유화가 아니라 수채화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유화와 수채화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3년 뒤, 파에드는 다시 한 번 로열 아카데미에 그의 작품을 걸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과 그의 친구   The Poor, the Poor Man's Friend / 40.6cm x 61 cm / oil on canvas / 1867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일을 잠시 멈췄습니다. 소녀의 뒤를 보니까 그의 아버지가 서 있습니다.

어망을 손질하던 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습니다. 못 마땅한 얼굴입니다.

무엇인가를 얻으러 온 것 같은데 비록 낡았지만 자신은 옷을 다 차려 입었고 어린 딸은 맨발인 것이 미웠겠지요.

그러고 보니 문 앞 에 서있는 남자의 표정도 어딘가 어색합니다.

그래도 어쩌면 조금 덜 가난한 사람과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아주 잘 사는 사람과 아주 못 사람이 함께 있는 시대 보다는

더 인간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가난함은 가난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1849, 스물 세 살이 되던 해, 파에드는 6점의 작품을 로열 아카데미에 출품 합니다.

그리고 첫 날 그의 작품이 모두 팔리는 성적을 냈습니다. 당시 ‘Art Journal’이라는 잡지에서는 파에드를 가장 유망한 젊은 화가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스코틀랜드 로열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됩니다.

다른 화가들에 비해 젊은 나이에 인정을 받은 셈이지요.

 

 

 

장기놀이    A Game of Draughts / 49.5cm x 59.6 cm / oil on panel

자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할 거지?

한 수를 옮기자 판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 수를 못 보았던 젊은이는 머리를 쥐어 보지만 이미 판은 돌이 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자들과 젊은 여인은 장기 놀이에 빠져 있고 아이는 음식에 정신이 없습니다. 구석에 앉은 할머니, 혼자 외롭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옛 거실 풍경이 이랬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식구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그립습니다.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어지러운 곳,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런 풍경이 점점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스물 여섯이 되던 해 파에드는 런던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3년 뒤, 소박한 시골 풍경을 묘사한 작품을 로열 아카데미에 전시했는데 대중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 났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매우 미남이었던 파에드는 런던에서 빠르게 화가로서 성공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What shall I say to him / 46.2cm x 61.4 cm / oil on canvas / 1888

 

편지를 쓰다 말고 생각에 잠긴 여인의 눈빛이 아련합니다.

머리 속에는 수 많은 말들이 떠 다니고 있지만 콕 집어서 옮기고 싶은 것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쓰면 혹시 오해를 하지는 않을까, 이런 표현은 충분히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 같지 않고 ---

머리 속으로 끝없이 문장을 썼다가 지우는 일이 반복되고 있겠지요. 지금은 컴퓨터 화면과 자판으로 쉽게 쓰고 지우지만

예전에 편지를 쓸 때면 여러 번 고쳐 쓴 편지를 마지막에 옮겨 적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생각은 옅어졌고 속도는 빨라졌습니다.

편지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느려도 좋으니까 예전처럼 생각 깊은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받고 싶습니다.

여인에게 한마디 해 주고 싶습니다.

당신의 속마음을 포장하지 말고 보여 주시면 됩니다. 포장이 진실을 왜곡하는 수가 많거든요.

 

파에드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작품 구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명쾌하게 스코틀랜드 풍속과 일상을 묘사했는데

그의 작품은 단순한 감상에 빠지지 않았고 기품을 유지한 것이어서 빅토리아 시대 대중들이 원하는 감성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예술가들이 성공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중들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거나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 기준을 어떤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담아 내는 것입니다.

 

 

 

세월의 무게   And with the burden of many years /153.5cm x 213.5 cm /oil on canvas / 1888

 

커다란 봇짐을 목에 건 여인이 잠시 길가에 앉아 쉬었다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방물장수 아닐까요?

굵은 힘줄이 여인의 손등을 달려 가고 있고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습니다.

이제는 힘든 일을 하지 않아야 할 나이인 것 같은데 이럴 수 밖에 없는 사연이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여인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은 봇짐의 무게뿐 아니라 세월도 함께 올라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이 그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세월의 무게가 어디 그녀만의 몫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오늘 다시 일어나 짐을 지고 걷습니다.

 

카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많아지자 파에드는 그들에 대한 모습을 작품 속에 담아 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민은 쉬운 결정이 아니지요. 또한 그의 많은 작품 속에는 풍경 속에 예쁜 소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다른 화가들도 이런 분위기를 따라 하곤 했습니다. 서른 다섯에 로열 아카데미 준 회원이 된 그는 3년 뒤, 정회원이 됩니다.

나이에 비해 아주 빠른 것이었죠.

 

 

 

의사의 왕진     The Doctor's Visit / 98.6cm x 125.5cm / oil on canvas / 1889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 보았더니 기다리던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은 밤새 앓다가 이제 막 잠이 든 것 같습니다.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데

여인 옆에는 아이가 요람에 누워 있습니다.

그나마 의사가 도착했다는 말에 정신을 차려 보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에는 쉬운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식구가 아프면 집안 전체가 우울하지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기 무섭게 찾아 와 준 의사 때문에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 해는 아프지 않고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파에드에 평가는 대개 호평이 많았습니다.

화가였지만 빛의 질감을 살려 순간을 잡아 내는 위대한 기록자였다는 것도 있고 기술적으로 진정한 전문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대중들의 관심에 직접적으로 다가서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가 앞에서는 파에드를 다시 한 번 돌이 보게 됩니다.

화면으로 보다가 그의 원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아이들이 잠들었을     When Children Are Asleep /152.4cm x 110.5cm / oil on canvas / 1885

 

신나게 돌던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엄마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난로 옆에 앉아 책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어지러워진 바닥을 정리하는 것은 다음 일입니다. 읽다 만 소설의 다음 대목이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요.

여인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집에서 읽다 만 소설 생각에 수업이 끝나자 마자 집으로 달려 가서 허겁지겁 숨겨 놓은소설을 꺼내 읽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이 다르다고요?

기분은 비슷한 것 아닐까요?

 

60대 중반이 되면서 파에드는 시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예순 일곱이 되던 해, 로열 아카데미에서 은퇴했지만 그에게는 아카데미 회원의 특권이 그대로 주어졌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겠지요. 파에드는 일흔 넷의 나이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파에드에 대한 평가 중 최고는 로버트 번즈가 스코틀랜드 문학에서 이룬 것과 같은 것을 파에드가 스코틀랜드 미술에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번즈는 농부 시인으로 알려진 사람으로 스코틀랜드 문학을 풍부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파에드 선생님, 이 정도 평가라면 서운하지 않으시죠?

 

 

출처 http://blog.naver.com/dkseon00/220289277286  레스카페님